경주국립박물관은 신라 천년의 수도였던 경주에 위치한 대한민국 대표 역사박물관 중 하나로, 신라 시대의 유물과 문화재를 중심으로 전시하고 있습니다. 소장유물은 8만 여 점이며 그중 3,000여 점을 상설 전시하고 있고 소장하고 있는 지정문화유산은 국보 13점, 보물 30점입니다.
3천여 점의 유물 중 어떤 것을 보아야 할지 어려움이 있기에 신라 역사관에서 꼭 봐야 하는 추천 작품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방문하면 교과서에 나오는 유물을 보고 오는 게 의미 있는 것 같아 교과서에 실린 유물을 소개합니다.
● 관람정보
1. 관람시간: 10:00~18:00 (입장마감: 종료 30분전까지)
매주 토요일(3~12월) 야간개관 (~ 21:00)
휴관일: 1월 1일, 설날, 추석
2. 입장료: 무료
3. 전시해설: 전시해설 일정에 맞춰 전시관 안내소를 찾아가면 됩니다. 인원은 30인 이내로 제한됩니다.
4. 박물관 주요 시설
메인 전시관은 신라 역사관으로 기원전 57년에서 기원후 935년까지 한반도 동남쪽에 있었던 천년왕국 신라를 만날 수 있는 전시관입니다. 신라 천년의 태동을 소개하는 1실, 신라 황금문화를 집중 조명한 2실, 삼국통일과 융성하는 통일신라문화를 다룬 3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교과서에 실린 추천 유물
1. 토우장식 항아리 - 국보
1 전시실 | 경주 미추왕릉지구 | 신라 5세기 | 높이 34cm |
1973년 미추왕릉지구에서 출토되었습니다. 긴목항아리에 다양한 모습의 토우들을 붙여 장식한 신라의 대표적인 토우장식 항아리입니다. 항아리의 목과 어깨 부분에 개구리의 뒷다리를 물고 있는 뱀과 오리 모양 토우를 세 곳에 일정한 간격을 두며 배치하고, 그 사이사이에 신라금을 타고 있는 사람, 사랑을 나누는 남녀, 물고기ㆍ새ㆍ거북 등의 여러 동물을 장식하였습니다. 동작의 순간을 포착한 생동감과 진흙의 투박함이 보이는 토우들은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조형물이며, 신라인의 생활 모습뿐만 아니라 자연과 어우러진 당대 사람들의 생각과 바람 등의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2. 금관총 출토 유물 - 국보
1 전시실 | 금관총 | 475~500년 |
1921년 9월, 경주 노서동에서 집을 짓던 터에서 아이들이 발견한 구슬을 우연히 일본 경찰이 보고 흑을 파낸 언덕에서 유물들을 발견했습니다. 그 언덕이 무덤이었고 금관을 비롯한 많은 유물들이 나왔습니다. 이 무덤에서 처음으로 금관이 나와 '금관총'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금관총은 475년~500년 사이에 축조된 돌무지덧널무덤으로 금관총에 묻힌 이는 머리 금관을 쓰고, 귀걸이, 목걸이 등을 차고 있었고 그룻, 장식품, 말갖춤, 무기 등 많은 보물이 있었다 합니다. 2013년 금관총에서 출토한 고리자루 큰 칼에서 '이사지왕'이라는 글자가 확인되었는데 '이사'는 이름, '지'는 이름 끝에 붙는 존칭, '왕'은 왕을 의미합니다. 왕의 이름이 새겨진 유물은 금관총에서 출토된 큰 칼이 유일한데 이사지왕이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500년 전후에 사망한 신라의 유력자 중 한 사람인 것은 분명합니다.
이 금관총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3. 황금보검 - 보물
2 전시실 | 경주 계림로 14호 무덤 | 신라 6세기 | 길이 36.0cm |
기하학적인 무늬의 아름다움과 함께 보석의 붉은빛과 잿빛, 금판의 금빛이 어우러져 화려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유물입니다. 이 황금보검은 카자흐스탄의 보로보에 유적에서 발견된 칼의 파편과 매우 비슷하며 중국 신장 위구르자치구의 키질 석굴 69동 벽화의 공양인도 이와 유사한 장식보검을 차고 있다 합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흑해 연안에서 중앙아시아에 걸친 지역에서 만들어져 신라에 들어온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아시아의 동쪽 끝에 위치한 신라가 서쪽 나라들과도 접촉하고 교류하였던 모습을 보여주는 유물입니다. 9세기 무렵의 이슬람 문헌에는 이슬람인이 신라에 정착했다는 기록이 있고 괘릉과 흥덕왕릉의 석인상은 신라인과 달리 눈이 깊고 코가 높은 이국적인 용모를 지녀 신라에 온 서아시아 사람을 모델로 조각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황금보검의 주인은 누구인가
계림로 14호 무덤은 돌무지덧널무덤으로 두 명의 남성이 묻혀있었습니다. 신라의 대외 교류를 보여주는 보물인 황금보검의 주인은 왼쪽 사람으로 서아시아나 중앙아시아에서 온 사람이 아닐까라는 추축이 있었으나 계림로 14호 무덤에는 황금보검 외에 수입한 것이 없고 무덤의 구조나 장례 방식에서 신라의 전통을 보이고 있어 이 보검이 주인은 신분이 매우 높은 신라인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4. 유리그릇
2 전시실 | 황남대총, 천마총 | 신라 6세기 | 높이 7.4cm |
신라는 한반도 동남쪽 끝에 자리하였으나 끊임없이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발전하였습니다. 외국과의 활발한 교류 사실을 보여주는 이국적인 물품에는 수입품도 있고 외래의 영향을 받아 신라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것도 있습니다. 지중해 연안이나 중앙아시아 등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만들어진 물품이 초원길과 비단길(실크로드), 바닷길 등을 통해 신라는 머나먼 지여고가 교류하거나 정보를 받았습니다. 특히 고구려나 백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유리그릇은 신라의 왕릉급 무덤에서만 확인되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유리는 황금에 버금가는 귀중한 재료였습니다. 유리그릇은 최상의 교역품이었으며, 신라로 전해진 대부분의 유리그릇은 동부 지중해 연안에서 제작된 로마 유리와 사산조 페르시아의 유리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신라 유리그릇은 지금까지 25개가 확인되었는데 금관이 출토된 황남대총과 서봉총, 금관총, 금령총, 천마총에도 모두 유리그릇이 부장 되어 최상의 위세품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황남대총 남쪽 무덤에서 7개, 북쪽 무덤에서는 4개의 유리그릇이 출토되었습니다.
5. 황남대총 출토 유물 - 2 전시실
황남대총(皇南大塚)은 신라 시대 최대 규모의 고분으로, 경북 경주시 대릉원 일원에 위치한 쌍무덤입니다. 20세기 중반 발굴을 통해 화려한 금관을 비롯한 신라 왕실 유물들이 다수 출토되어 신라의 문화와 왕권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입니다.
신라 왕실의 위엄과 예술 수준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고분으로 고분 구조와 유물 분석을 통해 신라 초기 왕권의 형성과 국제 교류, 예술, 종교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할 수 있는 핵심 유적입니다.
※ 주요 출토 유물
(1) 황남대총 금관 (북분 출토) - 금으로 만든 신라 왕실의 관. 나뭇가지 모양의 장식(수지형)과 사슴뿔 모양의 장식(녹각형)이 특징
(2) 금제 허리띠 (북분) - 왕권의 상징으로 정교한 장식과 금판에 새긴 문양이 매우 섬세함
(3) 천마도(天馬圖, 남분) - 말안장의 가죽 장식에 그려진 하늘을 나는 말 그림. 신라의 고유 회화유산으로, 유일하게 현존하는 고대 회화
(4) 금동 신발, 금 귀걸이, 유리구슬 등 - 화려한 장신구와 장례용품들이 고대 신라 귀족층의 부와 권위를 상징
6. 천마총 금관 - 국보
2 전시실 | 천마총 | 신라 6세기 | 높이 32.5cm |
오랜 시간 변치 않고 빛을 발하는 금은 예로부터 영원함과 고귀함의 상징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마립간이 통치하던 5세기부터 6세기 전반까지 신라는 고대 국가로서 비약적인 성장을 하였고 이 150년간이 신라 황금문화의 전성기였습니다. 관을 비롯하여 허리띠, 귀걸이, 팔찌, 빈지, 목걸이 등 각종 장신구뿐만 아니라 무기와 말갖춤(마구), 그릇 등을 만드는데 금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러한 각종 금제품을 무덤 안에 함께 넣어 죽은 이의 장례를 치르는 산자의 위세를 나타냈습니다.
신라는 4세기 중반 마립간이라는 칭호를 쓴 지배자를 중심으로 고대국가의 틀을 갖추기 시작하였습니다. 경주 시내에 남아있는 거대한 무덤들은 바로 마립간시기 지배집단의 무덤입니다. 마립간과 그 일족은 금ㆍ은ㆍ금동으로 화려하게 세공한 다양한 장신구를 사용해서 자신들의 신분을 과시했는데 황금은 최고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금관은 신라의 표상으로 금관은 대략
100년에 걸쳐 계속 만들어졌습니다. 지금까지 모두 6점이 발견된 신라 금관은 유행하던 시기에 따라 세부적인 형태가 조금씩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공통된 의장을 보입니다. 천마총 금관은 신라 금관 중 디자인의 완성도가 가장 높고 화려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처럼 비슷한 형태의 금관이 여러 점 출토된 경주와 같은 역사 도시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신라는 금관의 나라이자 황금의 나라입니다.
※ 천마총
1970년대 대릉원을 조성하여 역사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고자 신라 무덤을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첫 대상은 황남동 155호 무덤으로 1973년 4월 발굴을 시작했고 봉분의 규모는 밑지름이 47m, 높이가 13m였습니다. 봉분 윗부분을 7m가량 걷어내자 지금 23cm, 높이 6m의 돌무지가 나타났습니다.
무덤의 주인은 금관, 귀걸이, 옥으로 만든 가슴걸이, 금제 허리띠, 장식큰칼 등을 착용하고 묻혀 있었는데 껴묻거리 상자 안에는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두 장의 말다래가 들어있었습니다. 말의 배 양쪽에 늘어뜨렸던 말다래에는 하늘을 날아 올라가는 듯한 흰말(천마)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천마총'은 1500년 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이 천마도 발굴을 기념해 붙여진 이름입니다.
7. 포항 중성리 신라비 - 국보
3A 전시실 | 포항 중성리 | 높이 105.6cm | 너비 47.6~49.4cm |
포항 중성리 신라비는 재물과 관련된 소송의 평결을 담고 있습니다. 과거에 모단벌의 재물을 다른 사람이 빼앗았는데, 그 진상을 조사하여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주고 향후 이에 대해 재론하지 못하게 한 내용입니다. 비를 세운 연대는 비문 첫대목의 ‘신사’라는 간지와 비문 내용이나 표기법 등으로 볼 때 441년(눌지 마립간 25) 또는 501년(지증왕 2)으로 추정됩니다. 이는 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신라 비석으로 알려진 포항 냉수리 신라비(503년) 보다 앞섭니다. 비문은 대략 “신사년 어느 달 탁부의 습지 아간지 등이 사탁의 이 추지 내마 등에게 명령을 내렸다. 본모자 등이 사뢰기를, “소송 당사자는 탁배의 평공 사미 등이고, 사인은 내소독지이며, 도사는 탁의 염모지와 사탁 추수지이다”라고 쓰여있습니다. 거벌의 일사리 등이 세간에 명령한다. 진벌의 일은 옛날에 두지 사간지궁과 일부지궁이 빼앗았던 것이라 하였는데 이제 다시 모단벌에게 돌려주어라. 탁의 작민 사간지의 사인 과서모리가 “만약 후세에 다시 말썽을 일으키는 자가 있으면 중죄를 준다”라는 내용입니다.
8. 임신서기석 - 보물
3A 전시실 | 경주 석장동 | 높이 32.0cm |
이 비문은 임신년 6월 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3년 동안 유교의 사상과 도덕을 공부하고, 그것을 몸소 실천하며,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나라를 위하여 적극 나설 것을 맹세한 사실을 기록하였습니다. 또 먼저 신미년 7월 22일에는 3년 안에 시경과 상서, 예기와 춘추 등을 차례로 습득하기로 한 사실도 적혀있습니다. 이 내용은 당시 신라가 유교를 널리 수용하였음을 의미합니다. 비문을 지은 연대에 대해서는 552년(진흥왕 13), 612년(진평왕 34), 672년(문무왕 12), 732년(성덕왕 31) 등으로 견해가 크게 엇갈리는 상황인데 문장의 형태로 보아 삼국통일 이전에 비문을 지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비문은 대체로 “임신년 6월 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서 하며 쓴다. 지금으로부터 3년 이후에 충도를 집지하고 과실이 없기를 하늘 앞에 맹서 한다. 만약 이 일을 게을리하면 하늘로부터 큰 죄를 얻을 것이다. 만약에 나라가 불안하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워지면 적극 나설 것을 맹서 한다. 먼저 신미년 7월 22일에 시ㆍ상서ㆍ예기ㆍ춘추전을 차례로 3년 안에 습득하기로 크게 맹서 하였다”는 내용으로 해석됩니다.
9. 십이지상
(1) 김유신 무덤 출토 납석제 십이지상
3A 전시실 | 전 김유신 무덤 | 통일신라 7~8세기 | 높이 40.8cm |
곱돌로 만든 십이지상으로 김유신의 무덤이라고 전해오는 곳에서 출토된 것입니다. 십이지상 가운데 돼지를 묘사한 것으로, 이 외에 말과 토끼상이 발견되었습니다. 멧돼지의 머리 형상에 사람 몸을 하고 바위모양의 대좌 위에 서 있는 이 십이지상은 갑옷을 입고 오른손에 칼을 든 이른바 무사를 표현한 것입니다. 특히 지석의 성격을 지닌 점에서 통일신라 십이지신장상으로는 가장 먼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니다. 이와 같은 통일신라시대 무사 십이지상의 무복은 사천왕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합니다.
(2) 토제 십이지상
3A 전시실 | 경주 화곡리 | 통일신라 | 높이 15.1cm |
열두 방위(십이지)에 대한 개념은 이집트ㆍ그리스ㆍ중앙아시아ㆍ인도는 물론 중국ㆍ한국ㆍ일본 등 동서양에 걸쳐 광범위하게 걸쳐 있지만, 열두 방위 각각을 동물에 비유한 것은 중국의 전국시대부터입니다. 또한 사람 몸에 동물 얼굴을 한 십이지상이 나타나는 시기를 지금까지는 중국의 당나라 때부터로 보아왔지만, 최근에는 중국 수나라 때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통일신라시대의 십이지상은 처음에는 중국의 영향으로 조그마한 십이지용의 형태로 무덤 안에 부장 되다가, 곧 껴묻거리(부장품)에서 수호신으로 그 성격이 변하여 신장상의 모습으로 무덤 둘레에 배치되게 됩니다. 이 십이지상은 흙으로 빚어 구운 소조상이다. 용ㆍ뱀ㆍ말 소조상을 제외한 아홉 점이 경주시 내남면 화곡리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전 민애왕릉에서 나온 십이지상과 마찬가지로 무장복인 아닌 평복을 입고 공수자세를 하고 있고 무덤의 부장용으로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10. 얼굴무늬 수막새 - 보물
3B 전시실 | 경주 영묘사 터 | 현재 높이 11.5cm |
수줍음이 듬뿍 담긴 해사한 미소를 머금고 있어 ‘신라의 미소’로 불리는 신라의 원형 기와입니다.
영묘사 터에서 출토된 수막새는 일본인 다나카 도시노부가 골동상점에서 구입해 보관해 오다 1972년 국립경주박물관에 기증하였습니다. 사람 얼굴 모양을 한 기와는 익산 미륵사 터, 경주 황룡사 터 등에서도 출토되었지만, 이처럼 완벽한 얼굴 모양을 한 것은 이 기와가 유일합니다. 나쁜 기운을 물리치기 위해 얼굴무늬의 막새기와를 지붕 위에 올렸던 것으로 해석됩니다.
일반적인 기와 조성방법처럼 틀에 찍어 일률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먼저 형태를 잡은 후 손으로 직접 빚어 얼굴의 세부 형상을 만들고 도구를 써서 마무리한 작품입니다. 자연스럽고 정교한 솜씨로 보아 숙련된 장인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실제 사용한 흔적도 있습니다. 오른쪽 하단 일부가 결실되었으나 이마와 두 눈, 오똑한 코, 잔잔한 미소와 두 뺨의 턱 선이 높은 예술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유일하게 알려진 손으로 빚은 얼굴무니 수막새이자 신라인의 소박하면서도 인간적인 면모를 담아내 당시 우수한 기와 조성 기술이 집약된 대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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